[김교사의 생존법]

교사와 학생, 사랑 아니면 충돌?

칼럼 l Writer_김인규 upload_관리자 posted_Mar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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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무한한 사랑으로 학생을 대해야 한다고 한다.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미성숙한 아이들이 상하지 않도록 보살피고 빗나가지 않도록 붙들어주어야 하는 게 교사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육은 무한한 사랑이 전부일 수 없다. 교사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교육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압도적인 과업이 있다. 학생은 어떠해야 한다거나 또는 어떻게 성장해야 한다는 요구, 국가적 요구와 사회적 욕망이 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을 전제로 할 수 있으나, 그들 앞에 놓여있는 주류 욕망의 과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계층상승이라는 경쟁적 요구는 아주 단호하고도 힘겹다. 교사는 무엇보다도 이 요구에 충실해야 한다. 교사가 버티어내는 힘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는 '주류 욕망을 대변하는 권력기관'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학생들의 일반적인 욕구에 반하는 것만은 아니다. 누구나 그런 교사와 함께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고 싶을 것이다. 그 점이 학교를 다니는 가장 큰 이유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이 자유의지를 가진 또 다른 존재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 또한 어찌할 수 없다. ‘무엇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전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도전하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막 성장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미지이며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느냐’ 하는 의심과 항변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참고 견뎌야 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것을 납득하는 데에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두려움에 회피할 수도 있다. 순응하고 적응함으로써 얻는 이득에 빨리 눈을 뜨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것이 힘겨워 뛰쳐나가는 아이들도 있다. 적극적으로는 '일탈과 반항'으로, 소극적으로는 '태만과 거짓말'로 교사의 통제에 저항한다. 이유를 설명할 길은 없더라도 교사의 품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때로는 유·무형으로 집단화하여 교사에 대해 반-권력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게 교실에서 교사를 곤혹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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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작품  ⓒ김인규

 

최근에 와서 유독 ‘학생 중심’이라는 말이 교육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학생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애정을 쏟아 성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주의적인 교육관과 시민 사회적인 문화 의식의 증대와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정해진 지식을 익혀야 하던 과거의 산업사회가 종말을 맞이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기능적인 인간보다는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인간이 더 생산적이라는 이유다.

배움의 공동체 등 최근 유행하는 배움 중심적인 교육방법은 배움, 즉 학생의 배우는 행위를 그 중심에 놓으며 관심을 모아왔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화두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배움의 내용, 즉 학습 내용이 결국 국가 사회적 요구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학생 중심을 외친다고 하더라도 교육이란 일정한 외적 강제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학생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배움을 거부한다면, 혹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마도 교육에서 사랑을 말할 때는 이런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일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낙오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거부할 수 없는 질서 앞에서 상처 받은 아이들이 있기에 그들마저 함께 갈 수 있도록 보듬어야 하는 교육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움 중심’이란 아마도 그런 사랑을 교육방법으로 불러들인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일 정해진 과업과 목표마저 교육에서 전제되지 않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정해진 것이 없이 무엇을 배워야 할지, 어떻게 배워야 할지 정하는 데서부터 학생 하나하나가 그 중심에 놓여있다면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되뇌일 이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는 좌절이나 낙오도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버릴테니까. 그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가 되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도 끝내 상상에 맡겨둘 수밖에 없는 상상이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가운데 배움이 시작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에 배움은 시작된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과업을 전제로 시작된 일이다. 무엇보다도 기성사회의 욕망이 총화되어 그것을 부양하기 위해 형성된 제도인 것이다. 기성의 욕망이 미래를 열망할 때 교육은 자리하고 미래세대로서의 학생이 거기에 있게 된다. 그럼에도 그런 미래세대로서의 학생은 기성의 의지에 포섭되지 않은 자유의지로 열려 있기에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교육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학교는 기성세대의 욕망과 미래 세대의 욕망이 갈등하는 장소가 된다. 아직 성장하지 않은 미래세대의 욕망이란 정작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기에 때때로 설명할 길 없는 반항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미래세대의 새로운 의지가 담겨있다.

우리가 교육을 그러한 길항작용으로서 자각해본다면 교육행위는 조금 더 적극적인 무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교사는 학생들을 통제하고 길들이는데 급급하는 차원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지쳐 나자빠진 학생을 보듬는 일에서도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을지 모른다. 이때 교육목표는 출발점이지 결코 종착점은 아니게 된다. 목표를 가지고 학생을 만나는 교사와 그와 어긋나 있는 학생 사이에 벌어지는 미지의 세계이며, 무엇이 탄생되는지 지켜보는 흥미진진한 일이 될지 모른다. 기성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도, 학생이 원하는 바대로 해주는 것도 아닌 가운데 종착점은 그 언저리에서 밀당을 하며 어딘가로 향하게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존재인 학생과 마주하는 것이 교육이듯이,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일일지 모른다. 교육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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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작품  ⓒ김인규

 

김인규
[서천고등학교 미술교사] 30년 가까이 미술교사를 하고 살았다. 미술교육을 하면서도 예술가와 교사의 정체성 사이에서 그리고 학교가 어떤 곳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교사와 학생은 누구이고 어떤 관계인지 고민해 왔다. 저서로는 『안면도가 우리 학교야』(디딤돌,2005), 역서로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그리기』(문화과학사,2010), 『장소 특정적 미술』(현실문화,201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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