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

언어의 진화, 낯선 존재 방식에 대한 상상

칼럼 l Writer_설동준 upload_관리자 posted_Oct 23, 2017

같은 방에 있는 학생 둘이 카톡(Kakao Talk)으로 대화를 한다. 상사가 들으면 안 되는 비밀대화를 해야 하는 직장도 아니고, 큰 소리로 말해야 들릴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앉은 것도 아니다. 요즘 시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런 풍경은 확실히 낯설다. 흔히들 이런 현상을 두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졌다”, “스마트폰 문화나 미디어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라고 말한다.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세태 한탄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혀를 차며 씁쓸해하는 것 이상의 큰 변화에 대한 징후이다. 역사적 수준에서 언어와 소통 방식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가 표상하는 세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변한다는 것은 존재가 변한다는 것이고, 언어 소통에 장벽이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존재임을, 혹은 다른 세계에 속해있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하기에 소통의 매체로서 언어는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무엇일 것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다른 존재를, 특히 세대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들을 이해하는 창(window)이 될 수 있다.

 

 

구술 문화, 시공간적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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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전화기도 없고, 심지어 기록 매체인 문자조차 없던 시절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했을까? 구술과 청취는 우리의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술-청취‘도’ 가능한 지금의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구술-청취‘만’ 가능했던 문자 이전 문화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행히 월터 옹(Walter J. Ong)을 비롯한 미디어 생태학자들이 말의 ‘구술성’과 ‘문자성’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해두었다.

 

전화기, 화상캠 등의 기술 매체를 거치지 않은 구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전제 조건이 있다. 대화자 모두가 같은 시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생기는 소통의 풍부함은 상당하다. 같은 시공간, 같은 상황과 맥락에 속해있다는 것은 음성 언어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메시지뿐 아니라, 암묵적으로 전달되는 비가시적 메시지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아예 음성 발화가 없는 상황, 예를 들어 무언(無言)의 도제 수업 상황 역시 시공간적 공존과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구술성 대화의 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술 문화는 당연히 지식과 학습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식을 인간 기억력의 한계 속에서만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기억하기 좋은 형태로 전달하였다. 구전 방식이 리듬 있는 말의 형태를 가지는 경우가 흔한 이유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기억했다. 이것은 인간 지식의 폭이 협소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식이 삶의 맥락과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구술 문화는 현장적이고, 참여적이고, 상호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다.

 

 

문자 문화, 말과 사람의 ‘분리’

 

구텐베르크 이전, 희랍 시절에도 기록 매체로서 ‘문자’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문자 시대는 활판 인쇄술 이후에 시작되었다.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말’과 ‘말하는 사람’의 분리에 있다. 문자 시대는 발화자와 발화된 내용을 분리했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말(혹은 생각)이 기록되어 있고 타인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말과 사람의 분리는 대량의 지식 유통을 만들어낸다. 시공간이 분리된 100명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100번의 만남을 가질 필요 없이 편지든, 책이든 문자 매체를 복제, 인쇄하여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흔히 TV, 라디오를 대중매체(mass media)의 전형으로 말하지만, 일대다 커뮤니케이션과 일방향성이라는 특징으로 보면 책이 대중매체의 원형이다. 지식의 폭발적 증가, 의무 교육의 필요성 대두, 백과사전의 등장, 체계적인 교수법의 등장이 모두 문자 문화 시대의 풍경이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이름은 르네상스이다. 우리는 아직 르네상스의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

 

말과 사람의 분리라는 근본적 변화를 만든 문자 문화는 구술 문화와 달리 개인적, 관조적, 객관적, 추상적 성격을 가진다. 육성 발표와 달리 문체의 건조함과 객관성을 요구하는 탈인격적 글쓰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학계의 분위기는 문자 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방에서의 카톡 대화, 문자 시대의 구술성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하나의 방에서 나란히 앉아 카톡으로 대화하는 현상을 언어의 구술성과 문자성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구술 대화는 말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풍부한 맥락을 포함한다. 인간 신체를 매개로 하는 전(全)신체적 대화이다. 이에 반해 문자 대화는 맥락의 풍부함이 많이 사라졌다. 정신적 부담을 놓고 보자면 더 많은 집중과 풍부한 맥락의 해석을 요구하는 구술 대화가 문자 대화보다 힘이 많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나란히 앉아 카톡으로 대화하는 현상은 대인(對人) 커뮤니케이션에서의 밀도와 압력을 회피하는 대인 관계 능력의 약화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문자 대화는 온전히 문자적이지는 않다. 이모티콘만 주고받으면서도 일정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 인스타그램(Instagram) 같은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단지 문자의 실종, 문법의 파괴, 어휘력의 부족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자 기호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미묘한 맥락들을 전달하는 구술성의 복원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완결된 문장과 문단이 아닌 타임라인에 따른 흐름을 통해 의미를 완성해가는 SNS, 카카오톡 대화는 문자를 수단으로 삼고 있지만, 방식은 구술적이다. 이렇게 보면 바로 옆에 앉아서 카톡으로 대화하는 상황은 기술에 의해 촉발된 새로운 언어, 문자 기반 구술성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미래의 풍경, 뇌파 통신

 

그렇다면 시선을 더 멀리 던져서 미래의 대화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올해 4월에 열린 “F8 2017”에서 페이스북 수석 부사장 레지나 듀간(Regina Dugan)은 뇌파 통신에 대한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문자를 손으로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뇌파를 통해 글을 쓰는 기술을 말한다. 손으로 문자를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에서 실험적으로 성공한 바 있는 뇌파 통신은 언어와 대화와 지식에 대해 또 다른 낯섦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계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자연어 처리 기술(NLP, Natural Language Processing)을 적용한 아이폰 ‘시리’나 아마존 ‘알렉사’ 등도 신기한데, 뇌파 통신이 실현되면 신기함을 넘어 당혹스러울 것이다.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뇌의 전기 신호 단계에서 상호 의사소통을 해버리는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던 텔레파시가 바로 이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런 뇌파 통신을 수년 내에 실현하여 서로 다른 언어라는 장벽을 없애고 세계인의 진정한 ‘연결’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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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 2017에서 발표하고 있는 레지나 듀간

<출처 : 페이스북 뉴스룸 https://goo.gl/images/jEiGnn >

 

혹자는 이런 전망에 대해 문화권마다 언어가 표상하는 개념의 실제가 다른데 뇌파 통신이 오해 없는 ‘소통’이 되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꺼운 외투’라고 할 때, 열대 지역 사람과 극지방 사람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를 텐데,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의 뇌파가 같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문자 문화적 상상이 만드는 한계일 뿐이다. ‘두꺼운 옷’이라는 언어 기호를 매개로 하지 않고, 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하게 되면 ‘그것’을 ‘그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때는 정말로 말이 필요 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문자 언어와 구술 언어 세계의 너머에 있는 새로운 언어 형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뻗어보면 뇌파의 본질이 전기 신호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간은 뇌파를 통해 전기를 발생시키는 모든 것과 의사소통하게 될 수도 있다. 페이스북의 진정한 연결이 허언(虛言)만은 아니다.

 

 

식스 센스(Six Sense)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에 장난을 좀 치면, 존재는 언어라는 집 외에 여러 별장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시각적, 구두-청각적 감각의 세계라면, 미각, 후각, 촉각의 세계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문자를 위시한 언어의 지배력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의 다섯 감각에 더해 새로운 감각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되고 있다. 페이스북의 뇌파 통신 외에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초음파 감각 장치 등은 이미 개발되어 있다. 이 장치를 이용하면 현실 공간을 시각적으로 느끼지 않고 초음파가 그린 이미지로 느끼게 된다. 돌고래나 박쥐 등이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이 인간에게 더해지는 것인데, 기존에 없던 감각의 추가라는 측면에서 식스 센스(Six Sense)인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더해진 감각은 기존에 보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짐작하건대 인간의 감각은 7감각, 8감각으로 점점 더 확장될 것이고, 그때 만나는 세상은 지금과 사뭇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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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 컨퍼런스에서 초음파 장치를 통한 시각에 대해 발표하는 다니엘 키쉬

<출처: https://goo.gl/images/pnT6kG >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한 말 없는 카톡 대화를 그저 안타까운 디지털 세대의 세태로 볼 것이 아니라 감각의 변화, 새로운 언어 현상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 무리한 것일까? 이 낯섦을 직시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시대는 인공지능이라는 낯선 지능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인간(human)’ 이후의 인간, ‘포스트 휴먼’의 낯섦과도 공존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 변화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두렵지만 또한 가슴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Book &  브런치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교육공학도 설동준의 진지하고 성찰적인 book & column. 책과 전시, 영화 등 문화예술을 망라해 삶의 한 국면에 대한 조용한 성찰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 낸다. 설동준


 

설동준
문화예술 기획자 겸 교육공학도. 신앙, 윤리, 교육, 예술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최근에는 스타트업의 조직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민간 예술단체 및 스타트업을 위한 일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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