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장의 종횡무진]

평생학습은 시민교육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이슈 l Writer_정성원 upload_관리자 posted_Nov 20, 2017

한화 김승연과 통킹만

 

대기업 총수들의 범죄는 주로 ‘경제영역’이었다. 그러기에 ‘폭력사건’으로 법정에 선 한화 김승연 회장은 매우 특이한 사례다. 북창동 술집에서 종업원과 싸운 아들을 위해 조폭을 대동하고 찾아간 그. 그리고 이후 법정에서 자랑스럽다는 듯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권투하듯이, 아구를 몇 번 돌렸지”,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지”, “내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애들 시켜서 대신 때리게 했거든” 만일 아들이 새끼 손가락에 빨간약 바르면 낫는 정도의 경미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은 아들이 상대방에게 더 심한 상처를 입혔다면? 아무리 성정이 포악하다 한들 맘보파를 대동하고 액션활극까지 하였을까싶다. 갑자기 김승연 회장이 호출되어 의문의 1패를 당했지만 미국의 통킹만 사건이 이와 유사한 점이 있다.

베트남 해역에서 활동 중인 미국 구축함이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미 해군은 적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을 파괴시켰으며 10여명을 사살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미군 부상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미 정부는 이틀 뒤 또 공격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이를 계기로 당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와 베트남 참전에 대한 의회 승인을 요청했다. ‘내 아들이 맞았으니 복수하겠다’는 김회장의 판박이다. 그러나 미국은 1차 교전에서 빨간약 바르면 되는 수준의 상처를 입었고 상대편을 ‘떡실신’시켰다. 게다가 2차 교전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참전을 위한 그럴싸한 명분, 의회를 설득시키기 위한 ‘결정적 한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1971년 뉴욕타임즈는 미 국방부 관련 보고서를 입수하여 그것이 날조되었음을 보도하였고 1995년에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조작된 점이 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이로써 통킹만은 미국 자작극의 대명사로 등극하게 되었다.

당시 자본주의 맹주 미국과 기나긴 식민지에서 벗어난 베트남은 경제력과 물리력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컸다. 타이슨과 초딩 정도? 그리고 미국은 일방적으로 당했다면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들어 최첨단 무기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베트남에 들어간다. 그러나 김회장은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을 ‘떡실신’이라도 시켰지만 미국은 베트남 밀림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국내에서는 반전운동에 부딪혀 결국 링 위로 흰 수건을 던지고 말았다.

 

 

국가의 거짓말과 시민 그리고 평생학습

 

내가 피노키오였다면 내 코는 벌써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을 터. 그래도 아직 ‘아구’ 맞은 적 없고 그 일로 재판정에 가지도 않았다. 사기꾼이 아닌 바에야 개인의 거짓말은 주로 윤리적 영역에 국한되겠지만 공적 단위로 가면 그 여파가 심각해진다.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국가에 위임한다. 그에 따라 국가는 막대한 권한 심지어 합법적 살인권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향해 거짓말을 하고 조작을 일삼는다면?

최근 국정원의 범죄행각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다. ‘논두렁 시계’도 그중 하나이다. 국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망신주기를 하려 거짓 시나리오를 짰고 실제로 언론에 흘렸다. 언론은 이에 대해 그 어떠한 검증절차도 없이 대서특필함으로써 거짓에 동참하게 되고 이에 국민도 농락당함으로써 국정원의 계획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조사가 법리를 중심으로 한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지속적인 망신주기를 할 것임을 예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자신의 정적뿐 아니라 일반 시민사회의 발언권을 약화시키려 한, 그리하여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려 한 민주주의 유린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막강한 국가권력을 활용해서.

범죄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기 마련. 당시 사건과 연관된 국정원 직원들은 연일 수사·구속되고 있다. 언론은? 사법적 처리를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이미 심판을 내리고 있다. ‘기레기’라고. 그렇다면 욕설과 손가락질한 시민들의 책임은 없는가.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한 국정원과 마치 사실인양 호도한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의 잘못이 묻힐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보도가 된 것인지, 당사자의 소명은 들었는지를 한 번쯤 제대로 질문했어야 했다.

이 프레임을 평생학습계로 가져와 보자. 시민의식의 성숙에 관여하는 일은 평생학습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가 교육으로 환원되고 따라서 세상만사 평생학습의 문제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헤아려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 이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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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이것이 실화입니까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대한 통계조사를 한 이래 시민교육이 전국평균 1%를 넘어선 적이 있을까싶다. 하지만 사람과 자원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은 그래도 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대 강대중 교수의 글 <지방자치단체 시민교육의 정체성 모색>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서울 소재 2,818개 평생교육기관에서 개설한 프로그램 109,348개 중에서 시민참여교육은 267개였다고 한다. 비율로 계산해 보니 0.2%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계산기를 눌러봐도 마찬가지. 반올림 할 수도 없는 0.244%이다. 게다가 평생교육법에 따라 운영하고 있는 기관으로 범위를 좁히면 프로그램 수가 267개에서 20개로 뚝 떨어진다. 이 정도면 ‘없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민교육은 왜 찬밥일까? 1.시원을 찾아서

 

시민교육이 서자 취급받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먼저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그 시원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비교대상이 있으면 훨씬 명징하게 보이는 법이니 일본의 그것과 겹쳐보고자 한다. 수원시평생학습관 발간 웹진 ‘와’ 142호(2017년 8월 23일 발간)에 공주대 양병찬 교수와 일본 수도대학 도쿄 김윤정 교수가 각각 한국과 일본 평생학습의 전개양식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이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패전 이후 국가주의적 교육체제에 대한 반성에 기반 하여 새로운 교육체제를 만들어 나가는데 1946년 헌법제정과 더불어 사회교육 시설인 공민관을 일본 각지에 만들기 시작한다. 학교의 일부로 공민관이 생기거나 건물 자체가 없어 야외에서 학습하는 곳도 많았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공민관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헌법을 배우면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선거란 무엇인가’ 등등의 민주주의와 자치, 공공적 가치에 대해 학습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후 공민관의 사회적, 공공적 역할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99년 평생교육법 제정과 함께 공적 체제의 강화를 통해 발전의 양·질적 측면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다면적 변화를 서둘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평생학습 전달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의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과 인프라가 부족했다. 해서 일종의 편법을 사용하게 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딱한 상황, 이를테면 공공도서관을 평생학습관으로 지정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라고 하였으니 평생학습관이되 또한 평생학습관이 아닌 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자발적 시민사회조직은 헌신과 열정으로도 작동할 수 있지만 공적기관은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여간해선 움직이기 어렵다. 돈과 사람도 부족하고 게다가 부지불식간에 평생학습관으로 명을 받았으니 평생학습에 대한 전반적인 준비가 부재했을 것임은 불문가지. 그러니 거기에 어떤 깊은 철학과 가치를 기대할 수 있으랴. 실험과 도전은 언감생심이고, 철학의 부재 위에 돈과 사람의 부족은 결국 쉽고 편한 방식의 프로그램 개설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또 다시 근거와 관례가 되어 차기년도 프로그램 개설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 해 두 해 쌓이게 되면 한국 평생학습의 전통이 되고 강력한 성채가 되고 만다. 지금 평생학습관 이용객의 핵심은 50대 여성 그리고 40대와 30대 여성이 포진되어 있다. 남성은 찾기 어렵고 청년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미래라고 달라질까?

 

 

시민교육은 왜 찬밥일까 2.비판과 견제를 받지 않는다

 

여러분은 혹시 시민교육 부재에 대한 단 한 줄의 비판 기사라도 본적이 있는가.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평생학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는 있지만 기실 그것은 직업과 관련 있는 기술, 기능교육의 지속성 측면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 외의 교육 특히 시민교육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하다. 미디어의 건강한 비판이 활발히 제기된다면 외적 자극에 의해서라도 내적 긴장이 나타날 텐데 당분간 평생학습은 계속 마이너리티한 영역에 머물 가능성이 크기에 이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시 예산을 쓰면 시의회의 감사를 받게 되는데 이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시민교육의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지, 더 개선된 방식은 없는지에 관해 그 어떠한 질의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 전국이 대부분 대동소이할 것이다. 시의회의 경우 예산심의권이 있기 때문에 의원의 발언과 관심에 따라 해당 공무원은 일정 부분 반응하게 된다. 하지만 시의회의 발언과 검토에 따라 시민교육의 양적 질적 강화와 콘텐츠 보강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외부의 비판과 견제가 부재하다면 결국 내부 성찰이 관건이자 유일한 마중물이다. 하지만 “국가의 평생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자임하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시민교육의 부재에 관한 어떤 진지한 메시지도 던진 적이 없다. 일회성 시민교육 세미나는 열었으되 그것은 그야말로 뷔페 메뉴 중 하나였을 뿐이고 실제로 시민교육 부재를 타파할 전면적 고민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시민교육이 ‘잘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정도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 문재인정부에서 발표한 국정 100대 과제 안에 있는 평생교육 목표를 살펴보니 기존 정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당연히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이후 행보도 기존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민교육,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1. 일본의 사례

 

시민교육을 끌어 올린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5%, 10%, 50%? 그러나 시민교육은 단지 6진분류의 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기에 양적 확대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나는 몇 퍼센트 비중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학습의 중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육이 시민의 성숙과 성장에 기여하는 관점에 기초하여 배치되고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평생학습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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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일본 가와사키시 사이와이 공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나카무라 관장과 인터뷰를 하는 도중 깜짝 놀랐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맥락이었다.

 

“한국은 취미·교양 프로그램이 다수인데 이곳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하고 있는가”

“우리는 취미·교양 프로그램을 일체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왜 그런가”

“이곳은 시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그런데 꽃꽂이나 미술같은 개인의 취미를 위해 왜 공공자금을 써야 하는가. 그건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취미교양 프로그램 같은 것은 이곳 공민관에 뿌리를 둔 동아리를 중심으로 공개, 비공개 수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공민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봐야 당시 기준 연간 27개 수준, 대단히 적은 숫자다. 대신 ‘시민자주기획’ ‘시민자주사업’이라고 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공적 사안에 관한 세미나, 강좌를 기획하면 일정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웹진 ‘와’ 이번 148호에 기고한 김윤정 교수의 글을 보니 가와사키시의 사례가 전국적 모델은 아닌 듯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시민교육,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2. 스웨덴의 사례

 

홍준표 의원이 국회 운영위원장이던 2008년. 그는 국회로부터 매달 4,000~5,000만 원 가량의 특수활동비를 1년 동안 받았는데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에 휩싸이자 2015년 5월에 자신의 경선자금에 대한 해명성 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돈을 현금화해서 쓰다가 남은 돈을 아내에게 생활비로 줬다. 아내는 그 돈을 대여금고에 모아뒀다’ 성완종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특수활동비였다는 것이다. 엄연한 공적자금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음을 스스로 고백했음에도 그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스웨덴 모나 살린 부총리를 보자. 고졸학력, 주방보조와 단순 사무직 출신 최연소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노동부 최연소장관을 거쳐 부총리직에 오른다. 그리고 1995년 가을 스웨덴 최초의 여성총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대중의 질타를 받고 낙마하게 된다. 단돈 34만원. 그가 조카에게 줄 기저귀와 초콜릿을 업무용 카드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의원이 심히 부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엄격하고 투명한 시스템이 있기에 스웨덴의 청렴도는 늘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물질적 부와 잘 짜여진 사회복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는 국민행복지수를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부러움을 살만한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스터디 써클을 중심으로 한 전국민적 평생학습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발간하는 웹진 ‘다들’ 9·10월호에는 스웨덴성인교육협회(ABF) 대표 커스티 졸마(Kirsti Jolma)씨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에 따르면 ABF는 105년 역사를 가진 최대 규모의 교육단체인데 그 지부가 스웨덴 대부분의 지역에 결성되어 있으며 68개의 회원 단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관의 목표가 인상적이었다. 첫째가 “민주주의를 발전·강화 시킨다”는 것이다. 아니,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이 그 어느 나라보다 단단하다고 평가받는 스웨덴아닌가. 또한 평생학습 참여율이 70%가 넘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기관이 어떻게 보면 진부한 ‘민주주의 발전 강화’를 첫 번째 목표로 삼을 수 있을까. 우리네 평생학습 현실에 비춰보면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평생학습은 무엇인가

 

ABF의 목표는 존 듀이의 다음과 같은 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세대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며, 교육은 이를 위한 산파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합리적인 사회운영 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일 뿐 그 정수는 사람에게 있다. 민주주의가 어찌 매번 새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 제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이 지속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웨덴이 아니라 설사 천국이라 해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춰야 하며 여기에 교육이 지속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평생교육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수직성, 가정교육에서 사회교육까지의 수평성을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위 강대중 교수의 글에서 평생교육을 ‘평생’과 ‘교육’이라는 두 명사의 관계로 파악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자는 평생교육에서 교육의 소재와 내용이 학습자의 삶, 생활, 인생에서 얻어진 것, 후자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하는 것. 정리하자면 삶을 통해 길어 올린 것을 통해 사람의 변화에 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강교수의 이런 정의에 적극 공감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다름 아닌 시민교육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변화에 관여하는 것이 평생학습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강교수가 얘기 한 ‘존재의 변화’는 노동자가 자본가로의 변화나 치킨집 사장님이 교수로의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와 관점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철학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데 사실 이렇기 때문에 시민교육이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것은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이슈이니 이번에는 패스.

 

 

언론의 자유와 평생학습

 

<국경없는 기자회>는 2016년 4월에 세계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했는데 한국은 역대 최하위인 70위를 기록했다. ‘뚜렷한 문제가 있는 국가’로 분류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코멘트를 붙였다.

 

“정부는 비판을 참지 못하고 있고......”

 

그러나 비판을 참지 못하는 것이 비단 언론분야만일까?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해 경직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위증과 사인조작, 게다가 세월호 진실에 대한 집요한 방해에 이르면 턱하고 말문이 막힐 뿐이다.

결국 언론자유가 취약하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다는 것과 이음동의어인 셈이다.

우리는 그런 모욕적인 세월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왔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핵심인 성숙한 시민의식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지난 겨울 촛불을 통해 권위적인 정권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응급 심폐소생술일 뿐 결코 민주주의의 정상화가 아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핸드폰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35분이면 80%까지 고속으로 충전시키는 장치가 만들어졌지만 시민의식의 성숙에는 압축, 고속성장 장치가 있을리 없다. 하루하루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시민교육에는 왕도가 없다.

지난 6월 문재인대통령의 기념사를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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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장의 종횡무진 평생학습계의 아방가디스트, 수원시평생학습관의 선장인 정성원이 학습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 사회 이야기. 평생'학습'에서 평생'삶'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의심하고 질문하고 격려한다.


 

정성원
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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