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장의 종횡무진]

생각을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슈 l Writer_정성원 upload_관리자 posted_Jan 02, 2018

다음은 시민교육과 관련하여 최근 1~2개월 새에 지자체에서 개최한 포럼이다. 안산-“평생학습포럼 통 큰 시민교육 톺아보기”, 대전-“민주시민교육과 평생교육”, 대구-“시민교육, 백년대계를 말하다”, 성남-“민주시민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포럼만 나열한 것인데 아마 더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준점이 없으니 포럼 개최 숫자가 ‘많다’ ‘적다’를 논하기 어렵지만 시민교육에 관한 관심과 논의가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포럼이라는 형태로 외화되지 않았더라도 시민교육에 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것은 예년에 보기 힘든 풍경이기도 하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지자체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시민교육관련 조례이다. 동국대 홍윤기 교수1]에 따르면 “2014년 1월 9일 ‘서울특별시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이래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하여 2017년 12월 현재까지 4년 동안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통과되거나 발의 중에 있는 조례는 총 11건에 달한다.” 지금까지 중앙정부차원의 민주시민교육 법제화는 10여 차례나 논의 되었으나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 따라서 최근 몇 년간 보여준 지자체의 신속한 조례화 성공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자체 단위의 조례제정은 법률적, 현실적 힘을 가지고 있기에 지역차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게 마련이고 이에 따른 대응차원에서라도 시민교육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평생학습현장의 자기반성이다. 평생교육 프로그램 현황에 관한 데이터 조사 이래 시민참여교육은 1%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전혀 없었다. 언론조차 단 한 줄도 비판하지 않고 있다. 평생교육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지자체 단위에서 시행하는 시의회의 감사라고 해서 활발한 질의응답과 의견개진이 이뤄질리 없다. 외부의 비판은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내부적 성찰이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하지만 이 조차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촛불’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일상의 민주화를 고민하는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평생학습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던 현장의 응전이 맞닿으면서 이제 시민교육이 평생학습의 주요 의제로 조금씩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학습은 운전학원이 아니다

 

지자체의 민주시민교육 조례제정과 사업화에 있어 가장 왕성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이는 위의 홍교수인데 그는 담론을 넘어 실제 사업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매우 필요한 민주시민교육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응당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어떤 사업이든 초기 단계에서는 그 사업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잘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동의를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초기 동력 확보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홍교수는 민주시민교육과 평생학습의 차이성을 부각시키려는 듯 보인다. 홍교수는 위의 글에서 “민주시민교육 사업의 집행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국가 기관 및 자치단체에서 실행하는 각종 교육 서비스를 가장 주도적으로 집행하는 ‘평생교육’과의 관계 문제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민주시민교육과 평생교육을 ‘부딪치는 문제’라고 해석을 하는 순간 불가피하게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게 된다.

홍교수는 이어 민주시민교육의 핵심목표를 “종신 주권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데 있다고 정의하면서 평생교육의 목표는 “자신의 자아실현과 만족”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학습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새로운 자기상(自己像)을 어떻게 설정하든, ‘평생교육’에서는 이 자기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간여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면허증을 따기 위한 운전연수나 고득점을 위한 토익학원의 강습 등에는 오직 수강생의 목표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자기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간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은 면허시험이나 영어학원 강습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기상이 있다. 그러나 학습의 과정에서 자기상이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고 심지어 해체되기도 한다. 상호관계가 없는 학습은 이미 학습이라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비록 홀로 책을 읽더라도 우리는 수 만 번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홍교수는 평생학습의 주체를 집합명사 개념인 시민을 해체하고 철저히 ‘개인’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도록 한다는 헌법전문의 글을 “각인(各人) 즉 국민 개개인의 자기교육”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평생학습의 주체 그리고 개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여야 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단 한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진 헌법 전문은, 국민 각자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지녀야 할 가치와 지향을 선언한 글이지 특정한 평생학습의 주체와 내용에 관한 글이 아닌 것이다.

 

평생교육법에 언급되어 있는 시민참여교육의 개념은 이렇다. “현대의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할 자질과 역량을 개발하고 사회통합 및 공동체 형성과 관련하여 시민참여를 촉진하고 지원하는 평생교육” 따라서 원론적 측면에서 보면 평생학습이란 단지 개인의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주권자로서 갖추어 할 자질과 역량개발, 게다가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참여 촉진까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교수가 평생학습의 주체와 내용을 축소시켜 정의한 것은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보이지만 어쩌면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민교육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평생학습 현장, 차마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비루한 시민교육의 현실 때문이 아닐까싶다. 이렇게 보면 평생학습 현장은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

 

 

사람은 어떻게 바뀌는가

 

시민교육 1%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려 하면 대략난감하다. 관점을 달리해야 하며 기존의 프로세스와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에 은근히 품도 많이 들어간다. 게다가 구체적인 실행방법론에 들어가면 휴우, 한숨이 삐져나온다. 지식을 매개로 교수자와 학습자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설계하면 아주 익숙하고 쉬운 일이지만 이런 올드한 방식이 갖는 효과를 잘 알고 있기에 현장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의 근원에는 ‘사람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변화에 교육이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 아니, 사람이 변하기나 할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선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사물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절대적인 것까지 상대화시킬 수 있는 비판적 태도, 그리하여 자신의 절대 믿음을 밑에서부터 허무는 정보와 경험과 조언까지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팅되지 않으면 우리의 학습은 주마간산의 견학활동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지난 해 내 독서리스트를 살펴보니 ‘뇌 과학’ 분야가 압도적이었다. 2017년 연초에 특별히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지금까지 밝혀 낸 과학은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뇌와 내 생각의 관계, 어떤 생물학적인 변화가 인간의 변화를 촉진하는지 등등에 대해 궁금했기에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관 도서를 구입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 ‘스켑틱’이라는 잡지를 사게 되었다. <한겨레>에 소개된 아주 짧은 책 정보에 시선이 꽂혔었다. 그 책의 FOCUS가 “사람들은 왜 생각을 바꾸지 않는가”였기 때문이다. 그 FOCUS에 있던 원고 중 한편을 소개하려 한다. 짧은 글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양과학 계간지 ‘스켑틱(SKEPTIC)’ 원고를 게재하며

 

경향신문 2015년 3월 1일자에 따르면 ‘스켑틱’은 1992년 미국에서 창간돼 5만 여명의 독자를 가진 잡지이며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심리학, 인류학, 통계학 등 각 분야의 논쟁적인 이슈를 다룬다. 또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의 미심쩍은 현상들을 검증하는 글들을 수록한다. 편집위원으로는 리처드 도킨스, 제러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토프 코흐 등 유명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한국판 창간호가 2015년 3월에 발간되었다.

홈페이지 http://www.skeptic.co.kr/

 

‘스켑틱’ 측에서 해당 원고의 무상게재를 수락하여 웹진 ‘와’에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게시물의 저작권은 ‘스켑틱’에 있으며 무단전제 등의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 게재를 허락해준 ‘스켑틱’ 측에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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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필자는 20년 넘게 비판적 사고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해왔다. ‘증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자’가 나의 신조였고 수만 명의 학생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왜 강의에 처음 들어올 때 가졌던 터무니없는 생각-대체의학부터 외계인 납치, 오바마가 무슬림이라는 의혹 등-을 전혀 바꾸지 못한 채 강의실을 떠날까? 전부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일까?

문제는 모든 사람이 자기는 증거를 근거로 믿음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의 심각성도 그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든 트위터에서든 구글 검색 결과에서든,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거나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을 접하고 공유하고 나면 그것들을 믿음의 증거로 들이밀기 시작한다. 가짜 뉴스는 그저 빌미일 뿐, 믿음이 믿음의 증거로 쓰이게 되는 셈이다.

사람들에게 증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할 것을 강조하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현실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훌륭한 비판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어떤 믿음이 옳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지만 사실은 인지적 싱크홀에 스스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꼴이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구멍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가 남긴 유명한 말마따나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나쁜 생각을 합리화하는데 더 능숙하다.” 그 말은 똑똑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믿음이 실제로 옳은지와 상관없이 추론과 데이터를 잘 이용해 그 믿음을 뒷받침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회의주의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제안한다. 사람들에게 증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믿음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확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학생들이 거부감을 덜 느낀다.) 그리하면 비판적 사고가 가능해진다.

 

어떻게 하라는 뜻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믿는 제시카라는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녀에게 그 믿음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지 1점에서 10점 사이의 점수를 매겨보게 한다. 제시카가 9점을 매긴다면 그녀에게 어떤 증거를 접해야 그런 확신이 약해질 수 있을지 물어본다. 이를테면 그녀가 어떤 증거를 확인하면 확신이 9점에서 8점으로 또는 6점으로 떨어질까? 그녀에게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질문을 몇 가지 던진 다음 그런 증거를 찾아보도록 권한다.

철학자들은 이 과정을 ‘취소가능성defeasibility’이라 부른다. 취소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뒤집힐 수 있는가의 여부다. 예를 들어 무슬림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오바마가 맥주를 마시는 자진을 접하면 제시카의 확신은 9점에서 8점으로 떨어질 수 있을 테고, 오바마가 지난 8년간 컬럼비아 특별구에 있는 성 요한 성당에서 미사에 참가하는 비디오를 봤다면 그녀의 믿음이 6점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증거들을 들이밀어도 그녀의 확신은 꿈쩍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도전에 이력이 나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일는지도 알 수 없다.

포틀랜드 주립대학에서 ‘과학과 사이비과학’ 수업을 진행할 때 내 강의실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 남학생이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우겨댔다. 내가 프로젝터에 오바마가 맥주를 마시는 사진을 몇 장 띄우자 그 학생은 재깍 강력하게 항의했다. “합성된 사진이잖아요!” 나는 그 학생에게 그런 믿음을 얼마나 확신하는지 1~10점 사이의 점수를 매겨보라고 요구했다. 그는 9.9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에게 가산점을 줄 테니 그 사진들이 합성됐다는 주장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는지를 조목조목 밝히는 보고서를 제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전략이 먹히는 이유는 누구든 “어떤 증거가 있어야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떤 믿음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고 오로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상대방은 자신의 믿음을 재평가하고 수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모든 주장을 그런 식으로 검토한다면 사람들은 확신을 떨어뜨리는 증거를 찾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더 어려운 부분은, 어떤 질문을 받았지만 그 답을 모를 때 솔직히 “몰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라고 인정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이것들은 훈련할 가치가 있는 기술이다.

 

비판적 사고는 우리의 믿음이 틀렸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그에 맞춰 바로잡을 의지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겸손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장 우리부터 겸손이 일반적인 문화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믿음이나 추론 과정이 때로는 틀릴 수도 있고, 특히 우리의 전문분야에서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를 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즉, 사람들의 비판적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증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라’는 말을 천 번 이상 반복하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SKEPTIC

 

글 피터 보고시안 Peter Boghossian - 포틀랜드 주립대학 교수로, 오리건 보건과학대학의 연구원이기도 하다. <사이언티피 아메리칸>, <타임>, <철학자들의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번역 김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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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시민교육의 기반조성과 활용>, 2017년 성남시 민주시민교육포럼 발제문

 

 

 

 


정관장의 종횡무진 평생학습계의 아방가디스트, 수원시평생학습관의 선장인 정성원이 학습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 사회 이야기. 평생'학습'에서 평생'삶'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의심하고 질문하고 격려한다.


 

정성원
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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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일리톨 2018.01.21 15:46
    글 잘 읽었습니다. 유연한 사고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 명심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