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문화예술교육에서 배운다 ③

지역문화예술교육을 이해하는 단서들

이슈 l Writer_임재춘 upload_관리자 posted_Apr 09, 2018

닮은 듯 다른 평생교육과 문화예술교육. 1983년 제정된 사회교육법의 이름을 평생교육법으로 바꾼 지 20년이 되어 오고, 그 이름에서처럼 전 생애를 다루는 평생교육과 특정 영역인 문화예술교육은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규모와 상황이 전도된 듯 느껴진다. 배움은 본받음에서 시작하고 서로를 거울삼아 성장한다면, 평생교육의 성장을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마침 양적 팽창의 일로를 달리다 새 정부에 들어 질적 변신을 꾀하고 있는 시점이다. 웹진 <와>는 이번 호를 시작으로 4차례에 걸쳐 문화예술교육의 등장과 제도, 사업과 문제점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정책은 문화예술교육을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사회문화예술교육으로 나누어 학교와 학교 밖, 교육과 일상생활의 영역을 구분하여 제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좋은 삶에 대한 생각과 실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문화예술교육을 깊고 넓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누구든지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거나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노오력의 배신』(창비, 2016)은 현재를 청년으로 살아가는 이들만의 외침이 아닌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부부들의 것이고,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회와 어른들의 기대치에 10대의 삶을 저당 잡힌 청소년들의 것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한때 충만했던 경제적, 정신적 에너지를 20여 년 간 자식들에게 쏟아 부으며 정작 자신들의 노후는 준비하지 못한 채 늙어버린, 그럼에도 여전히 독립하지 못한 3,40대가 된 자식들을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모 세대의 한숨이다. 개인의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불평등과 격차는 2000년대 들어 더욱 심화되었고, 지금은 거시적인 경제 지표만이 아닌 각 개인의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체감되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사회양극화, 격차, 불평등은 삶과 사회를 구성하며 움직이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영역의 주요 의제로 등장한지 오래되었다. 2004∼2005년 사이,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의 제정을 준비하고 시행하는데 많은 논의들이 있었던 배경에 이와 같은 사회적 위기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며 나아간다는 일은 세상 모든 것들과 무관하지 않으니, 정책영역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이라 함은 그 개념과 범위를 정하여 문화예술교육 제도, 정책기반을 조성하였고 그 가운데 학교문화예술교육과 사회문화예술교육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상, 계층적 접근의 위험성과 가치의 기획

 

문화예술교육은 학습주체와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의 성격에 따라 구분, 추진되었다. 학습주체는 유아, 청소년, 성인, 노인의 연령별 구분과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정 등의 사회 소수자를 위한 계층적 접근을 말한다. 정책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회문화예술교육에서의 학습주체는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다양한 계층적 접근이 시도되었는데 군부대 문화예술교육, 학교폭력 문화예술교육, 교정시설 문화예술교육, 북한이탈주민 문화예술교육 등이 있다. 그러나 사회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활동이라는 문화예술교육의 기본적인 취지와 거리가 있는데다가, 지나치게 시혜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어 참여자들의 자발성, 주체성과 같은 요소들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부분의 문화예술교육이 미리 프로그램을 짜고 특정 지역이나 계층의 사람들을 모집군으로 하여 규모에 맞게 모아낸 후, 짜인 프로그램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나름의 감각과 견해를 가짐으로써 구체화되는 ‘창의성’은 ‘이미 짜인 것에 맞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견 계층에 따른 접근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로그램 기획이나 개발, 과정에서 각 대상의 특징이나 상황을 조사 연구하여 반영하기보다는 앞의 ‘짜인 것’을 대상만 바꿔가며 보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일례로 소외계층 대상 문화예술교육을 보면 기초수급대상자, 차상위계층, 장애인 등 이미 복지 등 행정체계 상에서 등록, 관리되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아 참가자를 모집하는 수고를 덜어내면서 교육적 미담을 만들려는 의도들이 적잖이 있어왔다. 이러한 태도들은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 대상 문화예술교육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문화예술교육을 학교 이외의 영역에 속한, 연령별, 계층별 대상에 대한 교육이라기보다, 삶의 근거지와 현장으로서 ‘지역 사회의’, ‘지역 사회에 관한’ 문화예술교육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의 성격은 각각 초중등교육법과 평생교육법에 근거하여 학교교육으로서 문화예술교육과 평생교육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으로 구분하였는데, 사회문화예술교육은 후자와 밀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회문화예술교육이 지향하는 문화적 가치와 교육적 가치가 무엇인가이다. 문화예술교육의 기회를 넓힌다는 것과 함께 문화예술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창의성과 문화적 해득력(cultural literacy)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술을 배운다, 예술을 통해 배운다, 예술을 가지고 배운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이 창의적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처럼 창의성이나 문화, 예술, 교육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생각, 정의가 존재한다. 이는 각자가 구현하려는 가치의 차이에서 생겨나고 이러한 차이를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적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 기획되어야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지원체계,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문화예술교육 종합계획 2018-2022>에서는 주요 의제로 3가지가 설정되었는데 ‘지역 기반 생태계 구축’, ‘수요자 중심 교육 다각화’, ‘문화예술교육 기반 고도화’ 이다. 이중 뒤에 두 개의 의제는 서로 연결되는 개념으로 해석 가능하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문화예술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접할 수 있도록, 가능한 사회의 모든 영역과 공간, 장소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이뤄지도록 체계와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과 위상을 필요로 하는 곳이 바로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이다. 현재 경기, 서울, 인천, 광주 등 전국 광역 지자체 단위로, 해당 지자체의 문화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지정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데 중앙의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사업을 현장과 연결하는 허브기관이다. 이들을 통해 문화예술인과 관련 단체를 지원하거나 협력하는 방식을 통해 참여자들이 체감하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기획, 운영된다고 할 수 있다.

앞의 글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정책적 그림과 비전, 실행력을 지녀야 하는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는 법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앙과의 관계에서 매우 수동적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 삶의 구체성에 접근하는 일은 지역 안에서도 광범위하고 섬세한 노력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무엇보다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이에 걸맞은 현실적인 기반(예산, 자율적 권한, 인력 안정성)을 가지고 지역적 경험과 역량을 쌓아갈 수 있도록 국가정책이 실질적인 역할을 하여야 할 때다. 지금까지의 문화예술교육이 양적 성장에 몰두하였다는 평가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지난 10여 년간 중앙 정책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할 때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문제제기, 나아가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방향을 걱정하고, 생각한 이들이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비롯해 지역 문화예술인들이었다. 제한된 권한과 역할 속에서도 문화예술교육을 하고자 하는 지역의 현장 문화예술인과 단체가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방법과 대안을 모색해온 곳도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이다. 이를 테면, 사회문화예술교육의 주요 사업인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의 경우, 지역을 소재로 삼고 지역주민을 교육 대상자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네에서 노는 과정, 동네를 읽는 과정, 동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 동네를 사유하는 시간, 동네의 온갖 것에 관한 관찰과 기록 등 문화예술교육을 드러내는 의미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지역 문화예술교육을 견인해 왔다(물론 지역마다 편차가 크지만).

 

 

 

문화예술교육의 복잡성

 

문화, 예술, 교육은 모두 사회나 학문 한 영역의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예술교육이 학교를 포함한 제교육의 문화를 전환하는 교육운동으로서 문화교육에 빚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시대와 호흡하는 예술과 예술가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절실함 역시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가,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에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덧붙여 문화, 예술, 교육이 각자의 영역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만 몰두해온 역사를 반성하면서 애초 삶의 경험과 지식, 언어였던 본래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내기 위해 각각의 지식과 체계,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고자 했음이다. 지식과 학문을 교육과정과 시험, 스펙을 넘어 삶의 언어와 맥락으로 끌어오고 직접 몸으로 겪어 체화된 지식으로의 경험을, 말하자면 좋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역량 내지는 능력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독립적이면서 순환되는 유무형의 구조와 환경을 문화 생태계라 통칭할 수 있는데 이의 구체적인 현장과 터전이 바로 사람이 사는 곳, 삶이 있는 곳, 바로 지역이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지역을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제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로 인한 부당함과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자기 그라운드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다. 어떤 사례가 우수하다는 말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이 지닌 개념의 복잡함을 각자의 삶으로 끄집어내어 실질적인 활동으로 연결하는데 도전하고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다. 각자가 경험하고 축적한 예술, 문화, 교육에 대해 나누며 서로에게 비춰봄으로서 스스로 비평하기도 한다. 공모로 진행되는 대부분의 지원사업은 전문가를 통해 모니터링과 컨설팅, 평가가 이뤄지는데 현장의 동력은 평가의 결과보다는 자기의 기획과 프로그램에 거리를 두고 반추하였던 시간과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들의 활동이 한 곳에서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지역을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이것은 문화예술인이나 단체의 역량 내지는 윤리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제도에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자기 그라운드를 만드는 사람들

 

인천에서 오랫동안 문화예술교육을 해온 단체, [퍼포먼스 반지하]는 스스로들을 포함하여 가난하지만 자존감 있게 사는 데 필요한 배움에 대해 고민하며 이웃들과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낡고 보잘 것 없는 동네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보다 사람들의 관계와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예술 활동을 그림, 영상, 퍼포먼스, 글쓰기 등을 통해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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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퍼포먼스 반지하  <출처: 인천문화예술교육통신 Vol.43>

 

몇 년 전부터는 “생활자의 학교를 열다.”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살림집을 동네의 교육공간으로 쓰면서 삶의 감각을 되살리고 북돋울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으로 보면, 주제별 대화와 토론, 스토리텔링, 글쓰기, 활동 계획하기와 실습, 보고서 작성 등으로 이구성된 생활교육교사양성과정이나, 4개월 남짓의 기간 동안 공부방 아이들과 실제로 살고 있는 동네와 인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명들을 관찰, 기록하고 디자인, 굿즈 제작으로 연결하는 숲생활교실 등이 눈에 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하였던 문화예술교육의 복잡한 면들이 어떻게 의미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는지 보여준다.

매일 똑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일상’을 끝도 없이 버텨야 하는 엄마와 아줌마들을 ‘생활자’로 격상시켰다. 그들 대부분은 결혼이나 육아 등으로 경제, 사회적인 활동이 단절되어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살림과 육아인데, 여기에 생활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육적 의미를 부여하고 함께 교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였다. 방법적으로는 예술적 재료, 도구, 작품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미적체험과 미적경험을 통한 생활학교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예술교육이 이렇게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네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작가의 작업을 엿보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연극단체가 주도하여 연극수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문화예술교육이냐 아니냐는 예술작업에 참여하였다, 연극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 일전에 놀이전문가 편해문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태어나 누워만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몸을 뒤집는다. 그러다가 또 어느 때가 되면 일어선다. 부들부들 떨리는 발을 떼더니 다음에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붙잡으며 몸을 지탱하였던 손을 스스로 놓아 비로소 직립보행의 인간계로 넘어온다. 두려움을 넘어 수십, 수백 번을 넘어지고 난 후다. 크는 것이다. 편해문 선생님은 이렇게 아이를 자라게 하는 힘이 아이 안에 있다고 말한다. 표피적인 문화의 양식, 예술의 형식만으로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지역문화예술교육의 질적인 성장 역시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인들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는 가운데 경험한 수많은 실패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새로움에의 열망을 가진 예술은 낯설고, 어색한 생각과 광경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관성화 된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실패라 여기기도 하는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도 처음에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현재 지역문화예술교육에 있어 골 깊은 문제 중에 하나가 정책의 전달체계와 의사결정의 권한이 지나치게 중앙정부(문체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역의 자율성이 보장받지 못하고 중앙정부를 통해 분배되는 많은 사업과 예산은 중앙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오면서 여러 문제들을 야기해왔다. 중앙정부 중심의 태도에 대해 지역의 문화역량이 신뢰할 만하지 못해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배움이 일어나는 원리와 동일하게 지역의 문화적 힘이라는 것 역시 시도와 실패를 통해 길러진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의 가치나 원리가 정책과 체계에는 적용되지 않은, 행정 주도의, 가시적인 성과 중심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태도와 인식은 문화예술교육 뿐만 아니라 교육, 복지 등 많은 공공정책과 행정이 이와 다르지 않다. 그나마 문화예술 영역의 사정이 가장 나은 편이라고들 말하기도 하는데 근본적인 전환, 궁극적인 성과를 위해 이제는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함께 의심해보고 성찰하면서 새로움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임재춘
생활적정랩 빼꼼 운영자, 前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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