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교육 ①

그녀들 - '보여짐'에 대한 단상

이슈 l Writer_정민승 upload_관리자 posted_May 08, 2018

 

1.

 

나는 보는 사람일까, 보여지는 사람일까?

중학교 시절 어느즈음, '뮤즈'라는 말을 알게 되고 나서,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영감이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존재라는 건, 사실은 보여지기 위해 준비해야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해준 기억은 없다. 여자는 행위의 주체인 남자들에게 보여지는 존재로 자기 정체성을 상당부분 구성한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보다 이십년은 더 지나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 거다. 스페인에 도착하자마다 프라도미술관에 찾아간 건 반쯤은 벨라스케즈의 시녀들(Las Meninas)’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술사보다 철학에서 더 유명한 벨라스케즈의 이 그림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푸코는 벨라스케즈의 이 그림이 재현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과 사물]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대개의 왕정 초상화와 달리,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은 왕과 왕비가 아니라 그 왕과 왕비를 바라보는 마르가리타 공주, 그리고 그 공주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을 그리고 있다. 모서리에는 화가의 모습도 살짝 드러난다. , 초상화라면 당연히 다뤄야할 왕가의 모습이 아니라,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온통 주변인으로 채워진 이 그림은, 나아가 왕과 왕비의 모습을 거울 속에 비친 희미한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늘상 주인공이었던 국왕의 힘을 이면으로 완전히 밀어낸다.

유령처럼 희미하게 그려진 거울속의 왕과 왕비. 그것을 그려내고 있는 벨라스케스. 중심이 되어야 할 중앙의, 아무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르가리타 공주.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벨라스케스는 자신이 보는 주체이되, 정면에서 볼 수는 없는 주체임을 알고 있었고, 필리페 4세의 권력은 거울에 비친 환영임을, 그가 자신의 자화상과 함께 그릴 수 있는 동료들이란 공주를 둘러싼 허접한 시녀들임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벨라스케스는 스스로 그림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감으로써 투명한 타자로부터 불투명한 동일자로 이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디까지를 드러낼 수 있는지 실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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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squez)의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 1656년

 

 

2.

 

본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으로 열려진 감각 중에 가장 정보가 많은 기관, 가장 이성적인 감각기관은 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받아들이는 정보 중 70% 이상을 시각을 통해 얻으며, 코와 귀, 혀와 피부가 느낌을 내세운다면 눈은 분석한다. 거리를 재고, 색을 분별하고, 형태를 틀지운다. 그래서 눈은 사실을 담는 그릇, 세상이 내면으로 들어오는 창으로 간주된다. 다툼이 있을 때, 한 쪽이 이 말을 하면 그 다툼은 쉽게 종료된다.

 

내가 봤어!”

 

하지만, 눈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 본 것이 정확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그 수많은 세상의 장면들 가운데 적합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눈이다. 눈은 일종의 여과장치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본다. 사람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보는지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사이머스와 차브리스의 유명한 실험이 입증해 주고 있다. 농구팀의 흰옷 입은 선수의 패스 숫자에 집중하도록 하자, 반수의 학생이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고 나타나 가슴을 두드리고 사라진 어이없는 사건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고싶은 것만보는 셈이다. 게다가 같이 보았다고 하더라도, 동일하게 기억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타인과 기억이 다른 것은 우리가 늘상 겪는 일이다. , 제대로 보고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생각보다 일반적인지 않은 셈이다.

시각이 주체의 경험일 뿐이라는 사실은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눈의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서 빛을 감지해서 시세포로 보내면, 시세포의 원추세포는 사물이 반사하는 빛의 파장을 받아들이고 분석해서 빛을 인식하고 시상으로 보내고, 시상에서 정보처리가 끝나면 그 내용을 대뇌피질의 시각 중추로 보낸다. 대뇌피질의 시각중추가 대상을 그려내고 나서야 사람들은 대상을 보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시각은 두뇌의 작업이지 눈의 작업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한 길이의 선분이 화살표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특정한 지점에 맹점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이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일 뿐임을 말해준다. ‘객관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감각은 근본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것이다. 카멜레온이 주변의 색과 스스로를 일체시키는 것처럼, 애초에 우리는 살기 위해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문제는 사회를 형성하고 안전이 보장되면서, 보는 것에 권력과 미와 질서와 통제가 담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보여지는 자의 구분은 생존과는 또다른 권력의 작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우리 사회에서의 통제를 모든 행위를 바라볼 수 있는 원형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체벌을 가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자가 바라보는 것에 의해, 정확히는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함에 의해 아이들-죄수들-환자들이 스스로 복종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순간 차근차근 작동하는 감시를 내면화했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상대의 규범에 맞춰 행동하게 했다. 응시와 통제는 동전의 양면으로 계속 보여지는 자를 규율의 사슬에 묶어두게 하는 것이다.

 

 

3.

 

누가 보고 누가 보여지는가?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권력을 가진 남성이 보고 있고, 여성은 그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지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많은 여성들의 정체성의 중심에는 보여짐이 있다. 권력자인 남성에게 유혹적으로 보여지는 여성. 실제로 19세기까지의 회화전통에서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이 부드럽고, 관능적이고, 수줍다. 르누아르의 여성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그들은 피아노를 치고, 꽃을 가꾸며, 나른한 볕 아래서 책을 읽는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도 그런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던가, 하교길에 길가에 피어있는 꽃을 만지면서 가볍게 걸으며 혹시 내가 잠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선녀는 아닐까라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그 하교 길을 떠올리면서 나는, 마치 소설의 3인칭 시점처럼, 내가 나에게서 빠져나와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나를 관찰자적으로 보는 것, 동시에 내가 누군가의 뮤즈가 되기를 바라는 것, 보는 사람이 아닌 보여지는 존재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여성적 수동성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등하교길의 일상 속에서 찬찬히 여성들 안에 쌓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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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올렝피아], 1863년

 

오랜 세월이 지나 마네의 <올렝피아>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런 수동성을 단박에 벗어던진 자세와 눈동자 때문이었을 거다. 그림을 잘 보면 누구나, 작품의 모델의 당당함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시나요?’를 묻는 다른 작품의 여성들과 달리, 마네의 올렝피아는 누군가가 보내온 꽃에도 무감하고, 자신을 그리는 화가에게도 사뭇 제대로 그릴 것을 요청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눈빛은 공손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깊고, 옷을 걸치지 않았지만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창녀쯤으로 여겨지는 여성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침대에 당당히 누드로 앉아있다니! 1865년 이 작품이 출품되었을 때, 귀족들의 거부감이나 비평가들의 비난은 예상된 것이었다. 그림 그 자체가 여성의 보는 주체의 선언이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떨까?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마네의 올렝피아와 늘 같이 언급되는 작품이다. 이는 일종의 누드의 양식으로 이후 상당히 많은 누드의 문법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안락한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는 이 여인은 남성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은 이런 그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남성과 달리 위의 올랭피아와 같은 자세에 더 편안함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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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7~1538년

 

 

아마, 거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여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이 묘사하고 있어 불편함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네의 올렝피아를 선뜻 좋다 하기도 어렵다. 올랭피아의 당당함은, 보여짐 속에 살아온 여성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그래서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4.

 

그렇다. 여성들은 능동이 아닌 수동, ‘욕망하는 주체가 아닌 보여지는 존재에 익숙하다. 70년대의 수많은 여성들은 오빠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무말 없이 공장에 들어갔던 걸까? 그 많은 당당하던 여자 대학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가사노동에 육아에 맞벌이까지 온갖 일을 해내면서도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물어보면, 주저할 수밖에 없게 커온 것일까? 아버지나 오빠나 남편 혹은 남성들의 욕구에 봉사하는 존재로 자신을 위치지워 왔기 때문이다.

주체가 되려면, ‘보여지는 존재라는 기존의 자아구성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신경을 쓰다보면, 자신의 욕구나 자신감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내가 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타자에게 맡기는방식으로 타인의 개입을 허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좋지만, 타인이 저것이 좋다고 하면 저것을 받이들이는 것. 타인이 옳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집행하는 것. 이렇게 해서 내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지게 되는 것이고, 여러 자아들은 갈등하게 된다.

이런 분열적인 자아관 속에서 여성은 스스로를 비난하게 된다. 자기가 희생하고 피해를 당했는데, “더해주지 못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투의 피해자들이 그 순간 저항하지 못했던 것. 그것은 수동적인 정체성이 갖는 흐릿한 경계를 뚫고 권력의 목소리가 쉽게 침입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피해여성의 자아에게 말한다. “위로가 되었잖아. 그러면 된 거야. , 힘들어도 참자.” 어느덧 여성이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번이 끝인 거야. 잘 참았어. 좀더 잘해주었음 더 좋았을 걸.”

 

 

5.

 

평생학습은 늘 학습자 주체성을 강조해왔다. 교육자로부터 학습자로 전달되는 지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의 지식을 구성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평생학습의 핵심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보자. 과연 학습자에게 기회를 주기만 하면 능동적인 수업이 가능한 것일까? 교육자가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학습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며 자기 나름의 의미를 구성해 나가게 될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보여지는 존재가 학습자의 중핵적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면, 학습자는 수업의 주체로 나서기 어렵다. 게다가 피동적인 정체성이 성별이라는 견고한 틀 안에서 형성된 상태라면 더욱더 그렇다. 능동성 혹은 주체성의 회복이라.. 말은 쉽지만 시작은 쉽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보고, 그 정체성을 겹겹이 싸고 있는 억압적 구조의 장막을 걷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오늘, 습성이 되어있는 보여지는 나를 걷어내는 시도를 해보자. 내가 가진 여성 혹은 성적 소수자라는 정체성이 내부의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를 다시 보자. 보여지는 나와 보는 나 사이에 놓여있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좋아했던 것, 늘 해보고 싶었지만 엄두내지 못했던 것으로 만들어진 작은 배를 만들어보기로 하자. 어쩌면 그 시작은 습성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잠시 접고,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가만히 침잠하는 것이 아닐까.

 

   

 

정민승
한국방송통신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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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mdidit 2018.05.21 11:13
    보여지는 사람, 보는 사람... 늘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나도 누군가를 보고 ... 별 생각없이 살아왔는데 글을 읽으면서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글을 두번 연거퍼 차분히 읽어 보고 갑니다. 좋으네요! 생각거리를 던져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