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교육 ②

혐오에 맞서기 위한 싸움과 배움

이슈 l Writer_최태섭 upload_관리자 posted_May 21, 2018

한국의 사회문제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해결책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X에 대한 인식개선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장이다. 정부도, 각 분야의 전문가도, 카페나 술집에서 시국대담을 나누는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을 실제 뜻으로 번역하면 문제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해법은 나도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개선을 해야 하니 학생들에게라도 가르치자정도가 될 것이다.

이쯤 되면 공허한 말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과 인식개선을 해법에서 제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원인이 아닐지라도 인식개선과 교육을 통해 문제해결의 원동력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해법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다. 그러므로 인식개선과 교육이라는 해법은 우리가 모든 사회문제들을 대면하는데 있어서 피해갈 길 없는 불가피하고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문제 중에는 여성혐오를 위시한 성소수자, 장애인, 타인종과 혼혈인, 빈곤층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가는 소수자혐오가 있다. 혐오의 양상과 층위는 다양하지만 효과는 같다. 소수자들의 사회적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을 현재의 차별적 상태에 묶어두는 것,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문제제기를 침묵시키고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 ‘그들을 차별함으로써 사실은 허울뿐인 우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산적한 다른 문제들을 감추는 것.

 

이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두 집단이다. 나머지 분야들이 비교적 덜 문제가 되는 것은 차별이 덜해서라기보다는 이 두 집단에 대한 공격이 특별히 거세기 때문이다. 양 집단들에 가해지는 공격의 결은 조금 다르다. 성소수자는 수적으로 소수이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성애만을 유일하고 공식화 할 수 있는 성애로 상정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을 받기도 어렵다.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들은 불확실한 정보들과 이성애중심주의가 낳은 편견들로 점철되어 있으며, 딱히 이것을 교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여기에 보수 기독교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속되는 위기를 맞이하며 과거에는 종북몰이와 색깔론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결집을 도모했던 반면, 최근에는 동성애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가 에이즈를 전염시키고, 성적 쾌락만을 쫓는 저속한 성애이며, 최종적으로는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고 사회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들의 근거는 자신들의 종교 경전과 교리, 그리고 대부분 학계에서 기각당한 반동성애적 연구결과들이다. 신정 분리 사회에서 종교교리가 누군가의 사회적 존재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이지만, 이들이 생산하고 인용하는 잘못된 연구들 역시 논의를 흐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보수 기독교의 움직임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져있는 극우 보수 정치세력과 만나 실체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행 선거제도하에서 지역사회의 중심축중 하나인 교회를 정치세력들이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권과 결탁하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방해하고, 지방의회들의 인권조례를 방해하거나 폐지시키고, 젠더나 성평등 같은 기초적인 개념들이 잘못되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동성애 캠페인을 통해 차별적인 언설들을 퍼트리고, 전환치료라는 인권침해적인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성소수자들의 삶을 위협한다.

 

한편 여성혐오의 대상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다. 모두가 여성으로부터 태어나고, 살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접하게 된다. 따라서 여성이 성소수자와 같이 비가시적이라거나, 만나기 어렵다거나, 수적으로 소수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차별의 메커니즘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다.

여성혐오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여성이라고 해도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젠더전쟁 양상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이성애자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언어적, 신체적 차별과 폭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중심에 있는 것은 반페미니즘이라는 담론적 흐름과,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들이 오늘날 남성을 역차별하고 있다는 주장들이다.

여기서도 배경은 성소수자차별과 마찬가지로 위기. 과거 제조업중심의 경제체제에서 여성들의 저임금/부불(가사)노동을 배경삼아 가장이자 생계부양자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남성들은,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따라 대거 그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반면 존재하는 남녀 간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이 약간이나마 성과를 거두면서 과거에 비해 여성들이 조금 더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여성과 남성이 생존을 위해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어려움이 생겨났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또 자신들이 과거와 같은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인식하며, 기존의 차별개선을 위해 마련된 제도들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 흐름이 성소수자 차별과 다른 점은 그 목적에 있다. 성소수자를 차별은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고, 그들을 차별함으로써 우리를 결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더 강력하며, 그들은 박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성은 이와 다르게 그들을 종속적인 위치에 붙잡아두고자 하는 목적이 더 크다. 일부의 여성들을 본보기 삼아 배제하거나 추방할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서 1등 시민인 남성들의 필요에 응답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통해 여성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들의 관습이자, ‘전략인 셈이다.

이런 여성혐오의 흐름의 중심에 청년세대 남성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간의 절망감을 자아낸다. 물론 한국사회의 청년남성들은 일상이 된 불황과 실업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설계해야하는 새로운환경에 놓여있긴 하지만, 이 조건에서 조금 더 열악한 상황을 청년여성들이 겪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혐오의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청년세대의 여성혐오는 디지털문화의 특성과 맞물려 놀이화되고 있으며, 공적책임이나 성숙한 토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 나아가 과거 소수자들이 투쟁을 위해 사용했던 언어들이나, 공적인 가치들을 반페미니즘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함으로써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사회적 신뢰를 저해하고 있다.

이 참담한 상황들에서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을 앉혀놓고 한 두 시간 떠드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냐다. 모든 교육의 맹점은 그것의 효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교육은 오히려 반감만을 산다. 내용에 못지않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태도가 중요하지만, 이것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특히 차별에 가담하고 그것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차별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고 공감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나는 두 방향의 접근이 동시에 이루어지면 이런 상황이 조금이나마 개선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먼저 하나는 개개인이 자신의 소중함과 권리, 그리고 책임을 깨닫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부분의 교육은 의무만을 요구하고 권리를 가르치거나 누리도록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고 행위 하는 내가 주변 사람들의 충분한 지지와 인정 속에서 굳건하게 서지 못하면, 그래서 나의 소중함과 권리로부터 다른 사람들의 소중함과 권리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말해준들 그것이 나의 문제로 인식될 리 만무하다. 다른 하나는 국가와 사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고 단호한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보호하며, 이 문제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과 그러한 사회가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지식들을 기꺼이 배우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 즐겁고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사회는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하든 한낱 기만일 뿐이다. 우리에겐 차고 넘칠 만큼의 뼈아픈 역사와 경험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혐오와 무지를 딛고 한 걸음을 나아가야 한다.

 

 

최태섭
문화평론가,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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