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장의 종횡무진]

젊고 싱싱한 풀뿌리 생활정치를 위해

이슈 l Writer_정성원 upload_관리자 posted_Sep 10, 2018


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느 가족>과 청춘


내 귀는 팔랑귀. 특별한 소신이나 취향도 없고 지조도 없다. 만수산 드렁칡으로 살고 있단 뜻이다. 그래서 영화관에 갈 경우에는 누군가로부터 괜찮다는 이야기가 내 귀를 스쳐간 이후다. “고뤠?” 그러니 지금까지의 관람영화 리스트를 굳이 살펴보면 취향과 개성이 없는 무색무취함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액션에서 에로까지 장르 폭도 넓고 유명짜한 감독부터 독립영화 감독까지 다양한 작가의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다 최근 내가 특정 감독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들짝.

지난 달 “고뤠?”를 외치며 본 영화가 <어느 가족>이다. 헌데 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봤더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꽂혔던 것인가? 그의 최근작 3편은 모두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공히 다 기존 가족 개념을 무참히 해체시키고 있었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개량적으로 밝혔다면 <어느 가족>에서는 혁명적으로 표현한다. ‘낳았다고 다 엄마가 아니다’라고 소리친다. 함께 한 공동의 경험과 추억도 없이 가족이라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청년에 관한 이 글을 쓰려 할 때 마침 그 영화가 떠올랐다. 살 부대끼며 더불어 산 흔적도 없는데 피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이라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면, 생물학적 나이가 청춘에 해당한다 해도 그 나이대에 걸맞는 고유한 분투와 경험이 부재할 경우 과연 청춘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부실한 상상력은 현실 앞에 그만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만다.



88만원 세대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3포세대’라는 개념이 비단 호사가들의 ‘조어(造語)놀이’가 아님을 실제 결혼과 출산 데이터가 너무나 진땀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연애결혼출산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취하거나 거부하는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본성적 행위, 자신의 통제 밖에 존재하는 그것이다. 인류가 6백만 년 전 침팬지에서 분화된 이래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지금의 위대한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한 개인의 삶을 넘어 종으로서의 삶 즉 번식이라는 행위를 온전히 수행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인류 진화의 오디세이에서 번식은 가장 원초적이면서 중요한 토대였고 이것은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누적된 본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선택 옵션’이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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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대 지구를 주름잡던 수많은 공룡들이 어느 날 순식간에 절멸한 것은 지구환경이 갑자기 순식간에 격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청년이 스스로 번식을 중단하겠다는 것은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실 ‘심각한 상황’의 내용이 무엇인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대란으로 표현되는 취업문제와 주거의 빈곤 등 한국사회 고질적인 문제가 청년에게 지금 집약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국민연금을 두고 노청간의 세대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래와 현재가 다 총체적으로 불안하기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안간힘을 다해 거부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출구 없는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고 고무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짜 ‘짱돌’과 ‘화염병’으로 혁명을 하자는 선동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든 청년들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결핍을 느껴 욕망이 발화하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욕망이 충족되던 청소년기를 보내왔고, 모험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라는 처세술을 일찍 깨우친 이들에게 ‘행동’은 혁명만큼 두렵고 낯선 일이다. 꿈조차 작은 이들에게 거대한 꿈을 꾸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포기하라는 말과 똑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강준만은 좀 다르게 접근한다. 청년들에게는 이념적, 원론적 접근보다는 좀 더 실질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익’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에 바리케이드 치지 않아도 되고 짱돌 들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토플책 들고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할 일 다해가면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공동 대응에도 관심을 보여주면 된다고 속삭인다. 거창한 이념이나 끈끈한 연대가 아니더라도 ‘청년유니온’이나 ‘민달팽이유니온’처럼 작은 일상의 경험과 승리를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책 제목이자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덧붙인다.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어서 옵쇼”와 데면데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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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은 중국집이 아니다. 청년이 들어 왔다고 해서 “어서 옵쇼”하지 않는다. 평상시는 데면데면이고 그나마 선거철이 돼야 ‘엽차’ 정도 내준다. 보통 정당이 청년을 반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늙은 정당의 주름살을 가려주는 비비크림”의 기능 때문이고(소위 DJ때부터 진행됐던 ‘젊은 피 수혈론’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20~30대 유권자 34%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19대 총선 당시 청년층을 타깃으로 민주당은 젊은층에게 인기를 끌었던 ‘슈퍼스타 K’ 방식을 차용하여 청년 비례대표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그때 오디션을 통해 국회로 입성한 이가 김광진(당시 31세), 장하나(당시 35세) 전의원이다. 청년층을 향한 구애는 그야말로 메뚜기 한철로 끝난다. 평상시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세 명의 공통점 두 가지는 뭘까? 첫째는 모두 다 대선후보였다는 점. 다른 하나는? 각 당의 인재영입위원장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정당별로 인재영입위원장은 있어도 ‘인재육성위원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평상시 청년을 육성하는 단단한 기초체력 강화가 아니라 필요할 때 마다 명망가 중심으로 영입해서 쓰겠다는 근시안적 태도와 관점이 각 정당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아무리 정당으로 들어가려 해도 그들을 안아 줄 품은 매우 협소하고 토양도 부족하다. ‘젊은 피 수혈론’이 ‘젊은 피 양성론’으로 바뀌지 않는 한 청년과 정당은 계속해서 불화를 겪을 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 청년의 진출 흐름


2016년 촛불은 일정 부분 정치적 각성의 계기로 작용했다. 그 에너지가 생활단위와 결합하게 되면 생활정치, 풀뿌리정치가 된다. 자신의 권리를 잘 행사하는 투표는 소중하다. 하지만 늘 선거의무만 수행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나도 피선거권이 있잖은가. 왜 후보자는 늘 근엄한 표정의 중장년뿐일까? 그래서 우리 생활이 바뀐 게 뭐지? 그들은 진짜 내 삶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걸까? 라는 의구심은 ‘내가 한번 직접 출마해 볼까?’라는 의식으로 에스컬레이터 되기도 한다. 이름하여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 마포 한 지역서점 주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평범한 4명의 출마로 이어졌다. 결과는? 묻지 않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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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원 출마 프로젝트 소속 청년 출마 모습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2018년 6월 지방선거 결과 데이터는 그마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기초·광역 단체장과 의회입성을 꿈꾼 40세 이하 청년은 2014년 지방선거에 비해 64명이 늘어난 522명. 당선자도 105명에서 199명으로 증가했다. 그래봐야 전체 당선인의 10%도 안되고 게다가 당선자는 대부분 거대 양당 출신이며 구의원프로젝트처럼 생활정치를 바꿀 의지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밑에서부터 하나씩 정치경험을 쌓는 청년이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럼 혹시, 청년의 정체성을 근간으로 정당 혹은 세력이 만들어질 수 있지않을까?



청년 정당은 가능할까?


한림대 국제대학원대학의 최태욱 교수는 2017년에 <고령화 저성장 양극화 시대의 청년정치 부상 가능성>이라는 논문을 「민주사회와 정책연구」에 게재했다. 최교수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면 이렇다.

한국은 현재 고령화, 저성장, 양극화 등의 주요 사회경제 문제들이 서로 악순환 관계를 형성하며, 다양한 차원과 수준에서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무한히 확대, 심화, 재생산시켜가고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최근에는 신종 사회갈등이라 할 수 있는 세대 간 갈등마저 첨예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개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분배 및 재분배 정책에 대한 민감도가 모든 연령층에 걸쳐 높아져가면서 세대간의 정치 선호 차이, 정확히 말하자면, 정당정치에 대한 선호 차이 역시 점점 더 뚜렷해져 가고 있다. 이른바 ‘세대정치’의 부상 조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세대정치의 부상은 주로 청년세대들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좋은 일자리는 계속 줄어드는데 고령화에 따른 복지 부담은 줄곧 늘기만 한다는 상황 인식, 보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분배 및 재분배 상황이 점점 더 자신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인식이 청년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이 ‘세대간 불평등 문제’ 혹은 ‘청년문제’는 결국 정치적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소위 ‘노인정치(gerontocracy)’의 위력에 따른 세대 불균형적 분배 정책의 소산이다. 따라서 청년세대의 저항과 반발이 그 정책, 더 정확히는 그러한 정책을 양산해내는 정부 혹은 정치에 대하여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경우에는 기성 정치에 대한 청년들의 그러한 불만이 청년정치의 부상, 그리고 나중에는 정당체계의 변화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감지되고 있는 세대정치 활성화 움직임은 종국에 한국 정당체계의 실질적 변화로까지 이어질 것인가? 요컨대, 유력한 청년 대표 정당이 부상할 수 있을까? 최교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청년정치의 수요가 증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것이 청년당의 부상과 같은 정당체계의 유의미한 변화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 핵심 원인은 제도 조건의 미성숙에 있다는 것이다.



너무 높은 진입장벽


최교수가 지적한 제도 조건의 미성숙을 떠나 정치권을 둘러싼 부조리한 법률과 관행이 노회찬 의원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9대 의원이었으나 삼성의 안기부 X파일 전·현직 검사를 실명 공개했다는 이유로 2013년 의원직을 상실했다. 의원직 상실은 곧 정치자금을 단 한푼도 수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의원직을 상실했을 뿐 촉망받던 정치인, 정치활동을 접은 것은 아니었지만 원외인사이기에 법적으로 후원금을 모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2016년 ‘드루킹’의 돈을 받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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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경우 예비후보자는 선거일 120일 전에 예비후보로 등록할 수 있고 등록 이후 후원회를 열 수 있다. 현직의원이야 1년 내내 법정 한도 내에서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으나 의원이 아닌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더욱이 지방의회의 경우 후보자는 물론이고 현직 의원도 후원회 자체를 둘 수 없게 되어 있다. 결국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특정 계층이나 지방 토호가 지방의회에 많이 진출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치는 일종의 돈 먹는 하마인데 신인, 원외, 지방의회의 경우 이런 진입장벽을 넘어서기 참으로 힘든 구조인 것이다.



넘사벽 자원의 부족, 시민 접촉면을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


상황이 이러하니 청년의 도전 그 자체가 숭고해 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청년이 의원이 되는 것 자체가 선은 아니다. 또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의원의 경우 청년세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에게만 호소하고 그들의 표만으로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의정활동 과정에서 세대 대변자라기보다는 지역의제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인해 자칫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이나 그룹에 포위될 수도 있다. 한편 다선의 노회한 선배 의원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청년의 정치참여를 적극 지지한다.

뜨거운 마그마는 지표면의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나온다. 그 터져 나온 마그마가, 한국사회 모순과 고통이 청년층을 덮쳤다. 하지만 권력기관에서의 청년 목소리는 대단히 과소대표되고 있다.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인 배분인데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그들의 당락여부를 결정짓는 사람들은 젊은 세대가 아니라 나이든 세대, 당연히 그들에게 더 많은 자원이 배분되기 마련이다. 현실은 늘 청년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청년은 정치의 효능감을 느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이 다시 청년의 정치외면을 낳고 또한 이것이 다시 정치효능감 제로로 수렴되는 악순환이 무한루프 재생산되어 왔다. 이 고리를 끊고자 일군의 청년들이 나서게 되었고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치 효능감을 이야기 할 때면 서울시립대 사례가 자주 언급된다.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반값등록금 정책이 실행되었다. 당연히 등록금은 반만 내게 되었다. 그 후 1년 뒤 실시된 2012년 4.11 총선에서 학생들의 부재자 투표율은 80%에 달했고, 전체 학생들의 투표 참여율 역시 2010년 지방선거 때보다 18%나 증가했다. 정치에 참여해서 내 삶이 바뀐 강렬한 경험, 그것이 투표율 증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노인 세대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된다고 해서, 그분들의 높은 투표율을 타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은 세대의 참여를 끌어올려야 한다. 이것은 선거에 즈음한 연예인 캠페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정치를 경험하고 그것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각성 그리하여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나의 문제,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유용한 수단이자 방법이 될 때 정치가 우리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20대 총선에서 청년유니온, 민달팽이유니온 등 20여 청년 단체가 네트워크를 결성해 공동의 목소리를 냈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제 청년 정치가 막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 하나 없다. 일단 선거의 핵심이랄 수 있는 돈과 조직에 있어 기존 정치인을 넘어설 수 없다. 자원의 넘사벽은 결국 시민과 더불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일상으로 들어가 생활 속에서 접촉면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것, 안타깝지만 그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일지 모르겠다. 이 속에서 학습은 어떻게,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가능하기나 할까? 학습관도 한 움큼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9월 19일 수요일 늦은 7시. 이번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4명의 젊은 후보자를 모시고 일종의 토크쇼를 진행합니다. 수원지역뿐 아니라 서울 그리고 멀리 제주도지사로 출마한 분도 참여 합니다. 떨어질 줄 알면서 이들은 왜 무모한 도전을 했을까요? 새로운 정치는 출마자 당사자의 몫으로만 돌려야 할까요?

좀 더 새로운 풀뿌리 생활정치를 원하신다면 일단 참석. 그리고 듣고 질문하기. 마음에 들면 열성팬 되기. 끝.


청년 정치 토크쇼 "골든 크로스: 대역전의 날" 바로가기 >>>







정관장의 종횡무진 평생학습계의 아방가디스트, 수원시평생학습관의 선장인 정성원이 학습의 관점에서 보는 한국 사회 이야기. 평생'학습'에서 평생'삶'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의심하고 질문하고 격려한다.



정성원
수원시평생학습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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